심장우 원로 장로님을 기리며

                ( In Memory of the Late Elder Emeritus Jang Woo Sim )

 

장로님의 생애는 마디로 하나님 중심의 삶이었읍니다.

45년간 신앙생활을 하신 '퀸즈한인교회' 장로님의 모든 것의 모든 것이었읍니다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한 얼마 안되어  6. 25 동란이 발발하자 바로 육군 소위로 임관되어 전쟁터에 소대장으로 배치되셨고, 평양을 거쳐 압록강까지 진격해 올라가셨읍니다. 장로님은 당시 전쟁터에서  30분만에 저격수에 의해 죽는 다고 해서 '30 소위'라고 불릴 정도로  위험한 사선에서 수없이 많은 죽을 고비를 넘기며 살아나셨다고 하셨읍니다. 신앙이 돈독한 어머님의 기도덕분이라고 하셨읍니다.

 

1959년에 소령으로 예편하신 장로님은 미국 켄터키 Murray주립 대학으로 유학 오셨읍니다. 영어가 전혀 안되니까 영어하고 가장 거리가 수학을 전공하셨다고 합니다.

4년후 1963년에 뉴욕Fordam약학대학을 졸업한 약사이신 서인숙 현재 권사님과 결혼해서 아들, 쟈니와 빌리를 슬하에 두셨읍니다.

 

19696월에 창립된 교회에9월부터 참석하셨읍니다. 그러므로 장로님은 본교회 뿐만 아니라, 이민 교회의  증인이십니다. 이시간에 같이 조명해 보고자 합니다.

 

1960년대에 이민의 물결속에 백의 민족이 옹기 종기 모여사는 후러싱 한복판에, 주님의 제자들이 다락방처럼 모여서 이민의 눈물을 씻었던 퀸즈한인교회였읍니다.

이민 초기 교회로써 교인들의 정착이 급선무였던 시절에 한진관 담임 목사님과 한태열 사모님은 정착을 도와주는데 바쁘셨을 때였고, 교회에  목사님을 도와 일할 수있는 사람이 없었읍니다. 당시 장로님은 중공업회사의 직원이셨고 권사님은 약사로 안정된 생활을 하셨으므로, 일꾼 없는 교회의 일을 교육부의 선생님으로 부터 시작해서 모든일을 도맡아 하셔야 했읍니다.

1974년에 교회의 장로로 추대 되셨고, 1970년대 후반 부터 1980년대에 걸쳐서 교회가 성령운동으로 뜨겁게 부흥할 때는 안되는 당회의 연장자로써 교회의 체제가 급변 해야하는 중책을 감당하셔야 했읍니다.

 

교회가 부흥하자 빌려 사용하던 Bowne Street 있었던 미국 교회당를 떠나지 않으면 되게 되었읍니다. 오랫동안 교회가 성전 부지를 위해 마음으로 기도 했었읍니다.

드디어 1984년에  세계의 수도 뉴욕에 한복판, 잭슨하잇에 교회의 대지를 기적적으로 구입하고, 우뚝 솟은 민족의 자체 교회성전을 건축하기 시작했읍니다. 교포 사회에서는 최초로 짓는 규모의 성전이었고, 어슬펐던 미주의 교포교회들로 하여금 새로운 시대를 바라보게 하는 배달민족의 성전의 표상이 되었읍니다.  당시 한국의 유명한 목사님들이 미국 뉴욕에 있는 퀸즈한인 교회 강단에 서시는 것을 자랑 정도였읍니다.  우리 교회당은 사람의 기부로 세워진 교회 아니었읍니다. 이민초기의 어려운 삶속에서 모든 성도들이 터진 손들 물집 잡힌 손들이 함께 기도로 세운 주님의 몸된 교회였읍니다. 그러니 당시에 얼마나 재정 난에 쪼들렸겠읍니까? 받으러 오면 목사님은 강단밑에 엎드려서 울며 기도 하시던 어려운 시기에, 장로님께서는 재정부장의 중책을 맡으셨고, 후에는 2 건축위원장으로,   목사님을 도와 교회에 출근하다 시피 하며 뉴욕시 건축과를 드나드시며 어려움을 감당하셨고, 당시 은행계통에 근무하시던 장로님은 은행 대출을 받으려고 점심시간 되면 식사를 샌드위치로 때우고는 만하탄의 은행마다 찿아 다니시며 백방으로 알아 보았으나 교회는 담보를 받을 근거가 없기 때문에 대출이 안된다고 걸음만 하셨다고 했읍니다.

 

이제 장로님을 마지막 환송하는 지금, 그때 어려움을 교회가 함께 감당했던 시절이 우리 마음속에 새삼스럽게 되살아 납니다.

 

일찌기 1987년에 자체 교회당을 마련한 교회는, 바로 다음 해인1988년부터, 100년전 복음의 빚을 우리 민족 교회의 사명을 하기 위해, 주님의 심장이 쏫아지는 복음의 미명지에 선교를 시작했읍니다. 뉴욕의 장자교회로써 다른 교포교회들 보다 앞서서 선교에 눈을 돌리게 하신 것은 교회를 향하신 하나님의 크신 은혜 였읍니다.

때는 한국교회의 초기 선교단계라 경험도 없었고 지침서도 없이, 열정만 갖고 맨몸으로 각자 뛰어들던 시절이였읍다. 때에 장로님이 초대 선교 위원장으로, 문이 열린 살벌한 동토의 러시아와 타시겐트, 알마타, 카작스탄, 우즈베키스탄, 그리고 죽의 장막이 아직 열리기 전에 중국의 연변, 훈춘, 이도백하, 북한의 평양, 나진, 선봉 등을 조심스럽게 목사님과 때로는 이성화 전도사님과 주윤덕 장로님과 김중현 장로님과 같이 여러번 방문하며 신학교와 교회를 세우고 지원하는 사역을 감당하셨읍니다. 뒤돌아 보면, 장로님은 교포교계 선교의 선구자이셨읍니다.

 

교회의 영성 훈련 프로그람 이였던 '퀸즈사랑의 불꽃' 에서는 2회에 걸쳐 프로그람의 평신도 리더인 렉타 하셨읍니다. Candidate들을 자상하게 보살피시며,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신 삶의 경험담을 나누는 사랑스런 장로님의 면모를 보여주셨읍니다.

 

장로님의 기독 장교단 활동과 월드비젼 활동과 뉴욕에 계신 목사님들과의 넓은 교제는 교단이 없는 우리 교회의 입지를 목사님의 명성 외에도 공고히 하게 했으며, 교계의 소식과 동향을 전달해 주시어서 교회간의 협조를 쉽게 있게 하셨읍니다.

 

장로님의 교회생활은 참으로 든든한 바위같이 흔들림이 없으셨읍니다.

창립후 초기에 교회가 크게 갈라질 때에도 장로님께서는 교회를 떠나지 않으시고 한진관 목사님 편에 홀로 서서 버팀목이 되어주셔서 어려운 시기를 넘길 수가 있었읍니다.

그런가 하면, 장로님께서는 항상 교인들의 대변자가 되어 주셨읍니다. 당회가 기관차 같이 달려가서 교인들이 감당하기 어려울 때에는, 비록 목사님과 친구같이 지내시면서도 교인들 편에 서서 얼굴을 붉혀 가면서 까지도 교인들 편에서 말씀하시곤 했읍니다. 그것을 사명으로 아셨읍니다.

2004년에35년간 한결같은 교회를 위한 장로님의 충성과 30년간 장로로 헌신하신 것을 기리기 위해72세로 교회 원로장로 추대 되셨읍니다.

 

장로님께서는 가정생활에서도 모범을 보여주셨읍니다. 권사님과 아들 쟈니와 빌리에게 참으로 충실하셨고, '가정에서 그토록 자상하게 대화 하실 수가 없어요'라고 하시며, '권사님 없이는 아무것도 하려하지 않으셨다' 말씀하십니다. , 손주 얘기만 나오면 환한 미소를 띄시며 손주자랑을 하는 순진한 할아버지셨읍니다.

 

장로님은 삶을 간단하고 긍정적으로 사셨읍니다. 심지어 암의 진단을 받고 수술과 방사선과 약물치료를 받으실 때에도 항상 당당하셨읍니다. 암의 공포에 절대로 함몰되지 않으셨읍니다. 재발이 되었을 때도 치료를 받으라고 한다고 담담하셨고, 이번에 갑짜지 입원하셨을 때에도 열이 내리고 정신만 조금 드시면 권사님께 조크를 하신다고 했읍니다. 의사들이 정신상태를 체크하느라고 서권사님을 가르키며, 'Who is she?'라고 물으니까 가소롭다는 듯이 대답을 안하시다가 의사가 가고나서는 권사님에게, ‘My wife 누구냐고 묻는 Stupid 의사가 있다 농을 하셨다고 합니다.

 

5년만 살면 되겠다고 하셨읍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 That's enough, 선한 싸움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다' 하셨읍니다.

장로님께서는,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있느냐'라고 하시며 당당히 죽음의 강을 건너, 생명강가에서 영광에 싸여 주님의 귀한 얼굴을 뵙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장로님, 장로님이 남기신 자리가 너무 커서 우리가 모두 허전 함을 느낍니다. 주일 아침 마다 심지어는 암치료를 받으면서도 최근까지, 베드로관에서 성도들과 담소하시다가 내려 오셔서 성전에 들어 오셔서는 희색이 만면하게 바퀴를 뒷자리로 돌며 인사를 나누시고는 앞자리에 앉으시던 모습이 눈앞에 아른 거립니다.

우리의 장로님이, 우리의 형님이, 우리의 오빠가, 아빠가, 할아버지가, 당신이 남기신 자리를 저희들이 메꾸어 가겠읍니다.

주안에서 편히 쉬십시요                                         

2014 11 30   최광남 장로

 

                        In Memory of the Late Elder Emeritus Jang Woo Sim

 

Elder Sim lived a God-centered life. 45 years of his church life at KCQ (Korean Church of Queens) meant absolutely everything to him.

 

Soon after he was admitted to the Korean Military Academy as a young man, the Korean War broke out and he was immediately appointed as a 2nd lieutenant and sent to the front battle line. His company advanced to Pyongyang and to the Yalu River, the northernmost boundary of the Korean Peninsula. Elder Sim has recounted that, "without his mother's prayers, he couldn't have survived the countless deadly perils he faced during the war."

 

After being discharged from the army in 1959, he came to the United States and gained admission to a Murray State University in Kentucky. He majored in mathematics because he thought it would not pose much of an issue caused by his difficulty with the English language at the time.  In 1963, he married Ms. In Sook Suh, a pharmacist and graduate of Fordham University. Together, they had two beloved sons, Johnny and Billy.

 

Elder Sim attended KCQ since September of 1969; the church itself was founded that June. He was not only an eyewitness to the history of KCQ, but also to Korean immigrant church history, in general. Now, I'd like to go over some of it with you all.

 

In the 1960's there was a great surge in Korean immigration and they flocked and settled in Flushing, Queens. Some Christians started gathering to seek comfort in this new, strange and frightening land and from that sprung The Korean Church of Queens. One of the main functions of the church at the time was assisting church members, newly arrived from Korea, in getting settled and acclimated in new environs. Rev. and Mrs.  Jin Kwan Han were extremely devoted and immersed in this business of getting church members settled. As the members of this new church were busy and engaged in getting themselves settled in this country, there was a lack of people available to serve in the various other areas required for a church to function. Elder Sim and his wife filled that crucial gap and tirelessly devoted themselves to all manner of service to the church, including teaching Sunday school. In 1974, Jang Woo Sim was ordained as an Elder and from the late 1970's through the 1980's, the church underwent a revival and surge as the Holy Spirit moved.  As a senior member of the Council of Elders, Elder Sim devoted himself to effectuating rapid changes in the church structure, as the times required.

 

In 1984, the longstanding prayers of this church came true and KCQ purchased the site where this church still currently sits, in Jackson Heights, the middle of New York City, and continued to build a church of Korean immigrants.  This church building was the first of its size amongst the Korean immigrant  communities in America. It became a symbolic building for the then timid Korean immigrant churches, opening their eyes to foster in a new era of Korean churches in this country. During that time, our church became renowned even among pastors in Korea and those invited to speak at our pulpit were duly proud. Our church wasn't built by the largess of a select few, but by and through the contributions, from limited resources, of all its members, many of whom were only newly arrived in this country. Accordingly, the building budget deficits were unimaginable. At that time, Elder Sim served as Budget Director and later, during the 2nd phase of construction, became Building Committee Director. In that vital role, Elder Sim was present at church almost every day, made numerous visits to the NYC Department of Buildings, and nearly every day, during the lunch hour, visited countless banks in vain to try to get a building loan for a church without an established financial background.

 

At this moment, as we are bidding farewell to our beloved Elder Sim, we are reminded of the difficult times we went through as a church.

 

Immediately following the completion of the church building project in 1987, our church began a missions project  in 1988, to pay forward the indebtedness of the Korean Church communities to the missionaries who came 100 years earlier to a Korea untouched by Christianity.  It was the Lord's grace that allowed that missions project, one of the first in New York, to spring from our church.  The drive to missions had just begun in Korean churches at that time; there was no manual, no strategy, and no tactic -- only burning hearts.  Everything was done and learned through trial and error.  Elder Sim became the first Director of Missions Projects and went to lands only recently accessible (Russia, Tashkent,  Almata, Kazakhstan, and Uzbekistan), as well as those not yet open for ready entry (Yangtze and Hunchun in China, and North Korea, where he went several times with Rev. Han, sometimes with Elder Joo Yun Duk and Kim Joong Hyun and Evan. Lee Sung Wha with extreme caution and set up a Pastor's School and churches and offered continued support). If we look back, we can see that Elder Sim was a true pioneer of missions in the early Korean immigrant church.

 

Queens Light of Love (QLL) was a Spirit revival program of our church and Elder Sim twice served as a Rector of that program. He cared deeply and compassionately about the program candidates and shared his God-led Christian life experiences with them, freely and with a loving heart.

 

His activities in the Korean Christian Military Officer's Organization in New York and World Vision and his relationships with numerous pastors city-wide helped grow our church's status and encouraged open communications within the Korean religious community.

 

Elder Sim's church life was solid, like a huge, unshakable rock.  In the beginning of our church history, there was a critical time when there was a threatened split among its membership. At that difficult time, Elder Sim stood firmly on the side of Rev. Han and didn't leave the church; his decisiveness helped the church overcome this critical period quickly.  At the same time, Elder Sim also gladly acted as a spokesman on behalf of the congregation.  During times when church members experienced difficulties in following new church guidelines, although he was  very close to Rev. Han, he often vociferously advocated for some modification of those guidelines for the church members, at times even raising his voice.  He saw that kind of compassion toward the church members as one of his missions.  In 2004, after 30 years of adroit service as an Elder at KCQ, he became  an Elder Emeritus at the age of 72.   

 

Elder Sim's family life was equally commendable as a loving husband and as a caring father to Johnny and Billy.  He loved to talk to his wife and children; he didn't want to do anything without his wife's involvement. If ever a conversation found its way to the topic of grandchildren, his face would break into a smile and he could not stop praising his. He was, among other things, a loving grandfather.

 

Elder Sim's lifestyle was simple and his attitude was always positive. Even when he was diagnosed with cancer and had surgery, radiation therapy and chemotherapy, he was ever bold and never allowed himself to succumb to the fear of cancer.  When he later learned that the cancer had recurred, he said, in a serene state of mind, "I need more treatments".  During his recent hospitalization, whenever he was even somewhat awake, he would joke with his wife. When the doctor, to evaluate him, pointed to Mrs. Sim and asked him, "Who is she?", he didn't answer. After the doctor left, Elder Sim turned to his wife and said, "What a  stupid doctor he is, asking a man who his own wife is".

 

Elder Sim wished to survive and live five more years, but the Lord said, "That's enough, My child.  You have fought the good fight, you have finished the race, you have kept the faith".  We can all imagine Elder Sim saying, "Where, O death, is your victory? Where, O death, is your sting?", as he peacefully and boldly crossed the river of death, meeting our Lord Jesus Christ at the river's edge, face-to-face in glory.

 

Dear, beloved Elder Sim, we are all left with a feeling of emptiness, as the vacuum you left is so immense.  We will always remember your smiling face and your seat in the sanctuary of our church.  Beloved Elder Sim, our older brother, father, grandfather, and husband! We will try, as you would have us do, to fill the vacuum you left, and we will never forget you.

 

Rest in the Peace of our Lord Jesus Christ.